다른 이야기 2012. 2. 9. 12:50
이 포스트는 2011/09/28 작성한 것을 재탕(…)한 내용입니다.

  1년 전, 미래의 제대한 나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일기장에 생각나는 대로 적어 내려갔던 일과 대강 축하한다는 말인 듯한 메시지 외엔 자세하게 어떤 내용인지 흐릿했다. 제대 후에 언젠가 보리라 생각만 하고 이제까지 꺼내 본 적이 없었다. 나른한 오후, 딱히 재밌다거나 손에 잡히는 일이 없어서 주변을 둘러보다 문득 편지 생각이 났다. 나름 차분한 분위기를 위해, 또 조금이나마 과거를 떠올리기 위해 군대에서 자주 들었던 '이루마'의 『Kiss the Rain』을 재생목록에 포함시켰다. 고요하게 퍼지는 피아노 선율이 내 마음속 과거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

갓 군대를 제대한 나, 민간인 ○○○에게,
안녕~ 사랑스런 ○○! 2년이란 긴 군 복무를 마치고 민간인으로 돌아온 심정이 어때? 분명 엄청나게 짜릿하고 행복할 거야, 그렇지? ㅎㅎ 내가 다 흐뭇해진다. ○ 병장님, 이제 어서 군인 티를 벗어내고 사회에 적응하라고. 와~ 근데 정말 상상이 안 된다. 난 아직 상병도 못 단 일병인데 말야. ㅎ 겨우 이제 1년이란 세월을 군에서 보냈는데 아직도 1년이 '더' 남았다니. ㅜㅜ 아~ 막막하다. 난 지금 최초로 연가를 사용해 6박 7일씩 2번이라는 대박 휴가를 마무리하는 중이란다. 아마 내일 5시쯤엔 울상을 하며 귀영을 위한 짐을 싸고 있겠지. 휴가는 아무리 보람차게 보내도 늘 아쉽더라고. ;; 암튼 난 지금 그래.

  「짜식, 일병주제에 아직 아무것도 모르면서」라는 생각에 실소가 터진다. 과거의 난 무척 전역을 기다렸나 보다. 나 자신에게 쓴 글인데도 글자 하나하나에 부러움이 가득 담겨있다. 그러다 문득 지금 나는 ○ 일병의 기대만큼 행복한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가 정작 지금의 나를 본다면 실망하지 않을까?

○○아, 넌 누구보다 군 생활을 힘들게 보냈다는 거 알고 있어. 하지만 난 그 추억들이 단순히 술안주용 얘깃거리로만 남길 원하지 않는단다. '군대'라는 저주받은 공간에서 네가 겪은 온갖 더럽고 구역질 나는 일들을 밑천으로 사회에 나가 어떤 일이든 포기 않고 할 수 있을 거라던 네 신념이 변하지 않길 바란다. 그곳에서 넌 생판 처음 하는 일에 적응하기 위해, 동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해, 좋은 선임이 되기 위해, 좋은 후임이 되기 위해, 스스로를 다스리는 인간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잖아.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실패조차 주님이 주신 선물임을 깨달으며 넌 성숙해졌을 거야. 언젠가 우리 하늘이 닫힌 것처럼 위기에 빠졌을 때, 냄새나는 그 화장실 좁은 칸에서 혼자 숨죽여 울던 아이를 기억하자. 그리고 다시 그랬던 것처럼 웃으며 일어나자!

지금 '이루마'의 『Kiss the Rain』을 들으며 너에게 편지를 쓰는 중이야. 성당 친구, ○○가 가끔 치던 곡이지. 기억하니? 내일 그에게 빌려줄 『악마와 미스 프랭』이라는 책을 영내에 가지고 갈 거야, 그가 마음에 들어 했으면 좋겠다. 후임 한 명에게 의지해 징징댔던 난데, 네가 나오기 전에 어디 많은 후임을 거느리고 있었니? 그리고 그들에게 박수받으며 제대할 자격을 넌 갖췄니? 이미 10월에 재대 했을 '그'를 여전히 무의미하게 증오하고 있니?

  그가 이야기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지금 나에겐 기억일 뿐이지만 과거의 그에겐 당장 닥쳐올 현실이겠지, 그럼에도 넌 참 밝게 말하고 있구나. 그도 『Kiss the Rain』을 듣고 있다는 글을 본 순간,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시간을 넘어 마주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더 힘든 쪽은 과거일 텐데 놀랍게도 위로와 격려를 받는 쪽은 지금의 나였다. 편지 속 한 마디마디가 가슴을 후벼 판다.

우린 이제 큰 산 하나를 넘었어. 하지만 그걸로 끝은 아니야, 너도 잘 알겠지. 우리 앞엔 더 흥미진진한 일들이 많을 거야. 세계 최고의 일러스트레이터─혹은 뮤직 비디오 감독─가 되기 위해 우리 다시 달릴 준비를 하자. 난 멋지니까, 주인공이니까 반드시 꿈을 이룰 거야. 정말로 2년 동안 수고 많았고 축하한다! 네가 자랑스럽다, ○○아!

2010/01/17

  과거는 그저 시간이 흐르면 잊히는, 되돌아 볼 필요가 없는 짐이라 여겼다. 그러나 과거는 어디까지나 지나간 현재였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시간이라는 사실을 나는 알아야 했다. 비록 그 시절의 나는 미숙하고 어렸지만 안일한 지금의 나보다는 신념에 찬 모습이었다. 군대를 벗어나 당장에라도 앞에 펼쳐진 미래로 달려들 야망을 품고 있었다. 그때의 그를 난 잊어서는 안 된다. 언제나 그를 기억하고 순간순간 온 힘을 다해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내가 과거의 나에게 보내는 최고의 답장이 되리라.


Posted by 비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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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싱고짱 2012.02.09 18:1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주인장님이 자신에게 쓴 편지를 몰래 보고 말았네요~ ^^
    일기 같기도 한 편지.. 스스로에 대한 다짐과 위로가 지나가는이에게도 힘이 되는 글귀네요.
    군 제대한지 1년 넘으신것 같은데 앞으로 멋진 인생 만들어 가시길 바래요.

  2. 철한자구/서해대교 2012.02.11 00:03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금쯤이시면 제대하신지 약 1년은 더 되신 것 같네요 ㅎ 그나저나 저도 곧 저때가 올텐데......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