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 이야기 2012. 2. 18. 00:39
이 포스트는 2010/05/09 작성한 것을 재탕(…)한 내용입니다.

  모든 예술가는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어느 것이던, 심지어 다른 이들이 만지기조차 꺼리는 추악하고 혐오스러운 부분에서도 미를 찾을 수 있어야 그를 예술가라 칭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표현'인데, 그들은 자신이 추구하는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끊임없는 고통의 늪에 주저 없이 뛰어든다─흔히 창작은 고통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는가? 그 고통은 머릴 쥐어뜯고, 잠을 설치고, 수천 번의 고뇌로 히스테리 증상을 표출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실제로 상당수의 예술가가 작품 활동을 위해 여러 방해 요소가 제거된 개인 별장으로 들어가는 것은 이미 모두에게 알려진 사실이다.

  여기서 예술가 자신이 '완벽함'이라는 또 하나의 위험 요소를 추구하는 사람이라면 그렇지 않은 것보다 그 고통의 정도가 배로 증가한다. 원고의 쉼표 하나를 수정하기 위해 하루하고 반나절을 꼬박 고민했던 '귀스타브 플로베르(Gustave Flaubert)'의 일화는 지독한 완벽주의가 예술이라는 명분으로 인간을 얼마나 혹사하는지 보여주는 바람직한 예이다. 나 역시 그림을 그리거나, 포스트를 작성할 때 이런 고통의 난관에 적지 않게, 아니 거의 매일 부딪힌다. 사소하게 삐쳐 나온 펜 선이나 적절한 어구가 떠오르지 않아서 말이다. 옆 사람이 무심코 듣다가 헛웃음을 지을 일인지언정 나에겐 이것도 고통스러운 작업의 일환이다. 이러다 보니 작품이 완성되어도 처음 구상했던 것과 비교해 만족스럽지 않고 맥없이 실망하기 마련인 것이다.

  그러나 『미를 추구하는 예술가(The Artist of the Beautiful)』는 이에 대해 오묘하면서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다. 오랜 세월의 시행착오를 거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창조해낸 작품이 무참히 파괴되었을 때 주인공은 차분한 태도로 일관한다. 바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낸 예술가의 면모로서, 자신이 만들어 낸 작품이 아닌 그 안에 깃든 예술가의 피와 땀으로 얼룩진 참된 아름다움을 관조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나도 언젠가 그런 경지에 이를 수 있을까?

예술가가 진실로 아름다움을 성취할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면 그 아름다움을 사람들의 감각에 느껴지도록 만드는 상징물 자체는 그의 눈에 그다지 가치가 있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의 정신은 상징물이 아닌 실체 자체를 즐기게 되는 것이니까(When the artist rose high enough to achieve the beautiful, the symbol by which he made it perceptible to mortal senses became of little value in his eyes while his spirit possessed itself in the enjoyment of the reality).

'너새니얼 호손(Nathaniel Hawthorne)', 『너새니얼 호손 단편선』, 천승걸 역, 민음사, 1998, p.149.


Posted by 비밀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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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핑구야 날자 2012.02.28 00:12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지속적으로 노력하시면 될겁니다